이노 히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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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관료 출신 정치인.
2. 생애[편집]
1891년 도쿄시에서 출생했고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모두 도쿄에서 입학·졸업했다. 이후 농상무성에서 관료로 근무하였고 농림성 잠사국장을 거쳐 1937년에는 기획원 초대 차장이 된다.
얼마 후 농림차관으로 취임하게 되고 1941년에는 고노에 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입각한다.
재임 당시인 1941년 8월 12일 뉴스에서 육성으로 "우리나라는 지금 전대미문의 중대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총을 들고 가장 중요한 식량의 증산을 돌을 깨물면서라도 이뤄내야만 합니다. 지금 농촌에는 증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일손과 비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한 톨이라도 더 많이 수확하기 위해 남녀노소 모두 힘을 합쳐 모내기, 잡초 뽑기, 벌레 퇴치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하며 식량 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추가로 "또한 도시민들도 쌀을 생산하기 위해 이련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해 주시고, 한 톨의 쌀이라도 낭비되지 않도록 협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라며 식량이 낭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였다. #
1941년 9월 9일에는 증산이 잘 이뤄지고 있는지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아오모리현을 비롯해 도호쿠의 각 현을 시찰하였다. #
도조 내각에서도 유임되어 1943년까지 재임한다. 이때 농림대신으로서 식량관리법[2] 을 성립시킨다. 농림대신 재임중이었던 1941년 말에는 척무대신[3] 으로 임명되며 1942년 11월까지 겸임하게 된다. 1942년에는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아 출마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지역구는 미에현 제1구였다. 1945년에는 호국동지회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회장을 역임한다. 다만 실세는 기시 노부스케였다.
전후인 1945년 9월 11일에는 A급 전쟁범죄자로 체포돼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가야 오키노리 전 대장대신과 바둑을 즐겼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 같은 해 석방되었고 12월 1일에는 중의원 의원직을 사직하였다.
공직 추방 해제 후, 1953년 제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로 미에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고 기시 노부스케계 참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녹풍회[4] 를 거쳐 1957년 8월에 자유민주당에 입당했다. 1959년에는 제5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제2차 기시 개조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입각했다. 1965년에는 제7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3선 의원이 되었고 훈일등 서보장을 수장했다. 1967년에는 탄핵재판소 재판장에 취임했다. 1972년에 훈일등 욱일대선장을 수장했다.
1971년 정계를 은퇴한 후에는 황학관대학과 학교법인 황학관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78년에는 자서전인 수필-이노 히로야 자서전(藻汐草井野碩哉自叙伝)을 저술했다. 이후 1980년 5월 19일, 신부전으로 인해 사망했고 현재는 츠키지 혼간지 와다 호리묘소에 묻혀있다. 사후에 정3위에 추서되었다.
3. 소속 정당[편집]
4. 선거 이력[편집]
5. 대중매체에서[편집]
6. 저서[편집]
- <수필-이노 히로야 자서전(藻汐草井野碩哉自叙伝)> (1978년)
7.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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